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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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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 AND HEARTS》
진풀
JIN PUL
2026.05.23 ~ 2026.06.21
빛을 응시한다. 작은 흔들림에도 쉬이 꺼질 만큼 연약하기만한 빛. 그럼에도 제 몸을 녹여 주변을 밝히는 빛의 마음을 우리는 무어라 불러야 할까. 진풀 작가의 개인전 《마음과 마음들》을 찾은 우리가 맨 처음 마주하는 것은 손바닥 위에 놓인 빛의 일렁임이다. 전시회의 표제를 담은 <마음과 마음들>(2024~) 연작은 석고로 뜬 어린아이의 손과 그 위에 놓인 촛불을 형상화하고 있다. 손은 고요한 하나이거나 여럿이 포개어 있기도 하다. 손바닥에는 빛을 품은 초가 주위를 밝히고 있다. 연한 분홍이거나 진녹색 혹은 부드러운 노란색으로 물든 손은 어둠에 잠식되지 않으려는 듯 서로를 잇는 한편 빛을 쌓아올린다. 그리하여 검푸르거나 검붉은 주변은 빛이 불러오는 어떤 숭고함에 밀려 자리를 내어놓고 한발 물러난다. 우리는 촛불의 빛을 바라보며 차분히 자신을 내어놓고 상념에 깃든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는 마음. 언제 꺼질지 몰라 위태롭기 그지없지만, 바로 그 이유로 촛불은 우리 자신의 취약성을 감싸 안으며 이를 사유케 한다.
촛불을 밝히는 마음을 생각해 본다. 내 안의 작은 빛을 밝히는 행위는 어둡기만 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잡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행위는 ‘나’라는 개인에 국한된 사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스스로를 녹여 주위를 밝히는 촛불은 개체적 층위에서 어떤 소망을 풀어내는 한편 그 소망이 ‘나’를 경유해 ‘너’라는 타자의 안온함을 기원하는 데 복무함으로써 존재를 곁으로 이끈다. 이를 우리는 ‘연대’라고 부른다. 주지하다시피 연대는 연결을 통해, 소외되거나 고립된 존재가 지닌 불안을 지운다. 그리하여 위축된 삶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공동체의 계기를 마련한다. 촛불을 밝히는 마음은 불안에 잠식된 존재를 위무하여 희망을 향한 의지로 충일하다. 독일의 철학자인 한병철이 이야기한 것처럼 희망하는 이는 타자를 향해 나아간다. 한병철, 『불안사회』, 최지수 옮김, 다산초당, 2024.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도 ‘나’를 세우고 고통의 심연을 견뎌내는 힘을 타자와 나누어 다른 삶의 가능성이라는 초월의 지반을 다진다.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마음과 마음들> 연작 속 빛이 재현하는 바가 타자와의 연대를 향해 있다곤 해도 그것을 품은 손의 분절성은 다른 상상을 불러오기도 한다. 잘린 손의 형상, 그것은 온전한 형태를 지니지 못한 채 촛농에 덮여 서서히 녹아내리는 고통을 가시화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취약한 인간이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한편 존재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타자의 고통에 몰입하여 공감과 연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숭고의 재현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진풀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한 작업노트에서 “불꽃과 촛농, 손의 표면은 서로를 반사하고 스며들며 고정된 형태가 아닌 변형과 이행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녹아내린 촛농이 유기적 형상으로 변화하는 모습은, 소멸이 단지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생성의 조건이 되기도 하는 삶의 역설을 암시한다”고 언급한다. “사라지는 불꽃을 붙잡으려 하기보다, 그 마지막 빛을 함께 나누고 이어받는 몸짓”은 소멸을 생성의 전회로 삼기 위한 고통스러운 통과의례로 읽힌다. 상실을 고통스럽게 예감하면서도 이를 새로운 삶의 지평으로 삼아 지속하는 관계의 층위로 올려놓고자 하는 작가의 재현 의지는 어디에서부터 연유하는 것일까. 이를 톺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진풀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찬찬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안정한 존재의 취약성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 진풀 작가는 자신의 신체를 석고상으로 치환하여 존재의 보편적 연약함과 유한함을 드러내곤 했다. 석고로 치환된 신체는 가상의 무대 위에서 붕괴된 형상으로 재현되거나(<색을 잃은 사람>, 2010) 머리를 잃은 채 무대 위 밝은 밤을 어쩌지 못한 채 휘청인다(, 2012). 또한 구름에 가려 막막한 세계 속에서 쇠꼬챙이와 같은 가느다란 그 무엇을 붙잡고 무너지지 않으려 애를 쓰곤 했다(<구름을 통과한 사람들>. 2009). 이러한 형상화는 <정지된 비상>(2009)에서처럼 새처럼 양팔을 벌린 채 한쪽 다리를 세우고 있는 인간의 모양으로 이곳에서의 탈주를 꿈꾸면서도 세계에 고착된 채 머물러 있어야 하는 존재의 슬픔을 은유한다. 벗어날 수 없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존재는 <잃어버린 꿈>(2011)에서 엿보이듯 코린트식 기둥 위에 서 있는 위태로움으로 표상된다. 존재가 딛고 서 있는 기둥 위에는 새의 둥지와 유사한 무엇이 있어 존재의 다리를 물들이고 있다. 둥지에 물든 발.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약을 위해 복무한다기보다는 어쩐지 존재를 세계에 고정시키는 물성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의 주위에 떠 있는 무수한 종이비행기나 전경에 배치된 커다란 종이비행기가 비상의 함의를 지니고 있다 해도 ‘종이’비행기의 취약성은 결국 존재의 취약성과 맞물려 비상의 욕망을 무화시키고 만다.
이러한 비상의 불가능성은 같은 시기에 그린 <나와 나의 사이>(2009~2011) 연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닥에 누워 있는 존재는 날갯짓하듯 팔 모양을 만들고 한쪽 다리를 들어 위를 향한다. 들린 다리를 따라 초록치마가 부풀어 금방이라도 활공할 것만 같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가 바닥에 붙어 떨어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위쪽으로 날아가기엔, 삶의 중력이 강하다. 바닥 경계면을 사이에 둔 반영태가 심연을 향해 존재를 끌어내리는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이를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도, 죽음과 삶의 알레고리로도 읽을 수 있겠다. 비상의 욕망이 좌절의 불안과 겹쳐 있는 이미지라고 할까. 이는 아마도 진풀 작가가 감각한 존재의 불완전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그렇다고 작가가 불완전한 존재의 비극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밤>(2015)이 형상화한 것처럼 파편화되고 분절된 방식일지라도 각자의 비극을 관전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살아있음의 경외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형체를 갖추지 못한 저 개별적이기만 한 팔들이 자신의 감정에 취해 손수건으로 비가시적인 눈물을 훔치거나 스마트폰에 몰입하여 자신만의 무대를 응시할 수도 있지만, 관객석이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존재에 착목하여 ‘나’를 전유해 ‘나와 나 사이’ 그리고 ‘나와 너 사이’에 ‘우리’를 놓을 어떤 가능성을 살필 수 있게 한다.
‘나와 나 사이’에 놓인 경계 혹은 접합면을 어쩌지 못한 채 불가피한 실패를 반복하리라는 예감을 끊임없이 수행하던 진풀 작가의 예술적 열망은 201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변모한다. 여타의 사정 속에서 작가는 과거 자신의 작품을 찢었던 경험이 있다. 작품이 그려진 캔버스를 찢는 것은 단지 작품의 파쇄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자 지난 시간을 삭제하는 일이며 사적 역사를 지우는 일이자 죽음을 미메시스하는 일이기도 하다. 자기 유폐의 적극적 의지. 그 속에서 작가는 깊이 가라앉는다. 순전한 추측에 불과하겠지만 다시는 떠오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활의 층위에서 감각되는 일상 혹은 정상성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과정에서 느낄 법한 전락에의 불안이 존재의 불안정성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과거를 폐기하지 않고 죽음으로부터 삶을 다시 길러 올리듯, 또다시 비상을 위한 도약을 시도한다. 2017년부터 이어가고 있는 연작을 통해 작가는 찢고 자른 캔버스의 조각을 분갈이하여 키네틱 아트의 형식으로 오브제화하는 한편 식물이 지닌 생명성과 치유, 회복의 층위로 기억과 감정을 재구성한다. 자기 재생을 모색하고 새로운 자신을 생성해 낸 것이다.
‘서로-함께-되기’의 가능성
진풀 작가가 생성해 내는 새로운 자신, 그것은 소멸에의 감각으로부터 파생되는 자기 서사의 양태라 할 만하다. 자기 서사란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타자와 자기 자신을 향해 이야기하는 일이다. 그것은 메마른 사막에 한 동이의 물을 반복해 뿌려 나무를 자라게 하여 푸른 빛을 선물하고 그 위에 옷을 걸어 삶의 흔적을 공유하는 태도와 유사하다(<숨이 솟는 자리>, 2018). 그렇게 자라난 나무에 배태된 생성의 자기 서사는 숲을 이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능동적인 존재로 성찰하도록 이끈다.
2020년대 들어 진풀 작가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여준다. 그중 <산 사람들>(2023) 연작은 작가가 언급하듯 ‘살아 있는 사람’과 ‘숲처럼 존재하는 사람들’을 겹쳐 사유한 결과물이다. 거대한 산맥의 부분을 잘라내 형상화한 듯 보이는 <산 사람들> 연작은 얼핏 사람의 형상을 찾아볼 수 없는 듯도 하지만 오래 응시하다 보면 고개를 숙인 존재가 서로의 등과 어깨를 겯고 있는 양태로 감각된다. 이는 물감을 캔버스에 뿌려 롤러로 밀어내며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 즉 작품에 몸의 무게를 싣는 방식으로 획득된 그 무엇이다. 그것은 붓이 지닌 분절된 행위가 아닌 하나의 유기적 흐름을 만들어내며 캔버스에 기대어 숨을 쌓고 삶을 소진함으로써 사람과 사람의 단단한 연대를 맥락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이미지는 ‘얼지 않는 마음’. ‘자라나는 마음’ 등의 제목으로 변주되어 서로가 서로를 든든히 지키는 마음의 정동을 그려낸다. 그렇게 <산 사람들> 연작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삶의 유한성과 그 안에서 연대의 기억을 시각화한 작품으로 살아 있는 이들이 떠난 이들을 애도하고 삶을 견디는 모습을 하나의 풍경’이 되어 우리 앞에 펼쳐진다. 그럼으로써 이 연작은 파편화된 개체의 실존적 궁핍이 거대한 숲을 이룬 연대적 주체의 충일함으로 전유되어 “서로-함께-되기(becoming-with-one-another)” 주디스 버틀러, 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의 가능성을 상상케 한다.
‘서로-함께-되기’의 가능성, 그것은 식물성으로부터 사유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식물성의 사유는 환원, 반복, 유기성을 근간으로 삼으며 대개 정적인 사태, 세계의 단일성, 본질 회귀 및 만물을 감싸 안는 포용의 이미지로 수용된다. 진풀 작가의 또 다른 연작인 <살아낸 풍경>(2025~)을 보자. 2024년 11월 27일에 작가가 경험한 바(“예기치 못한 폭설로 잎을 단 채 꺾인 나무들을 보며, 나는 생의 불확실성과 동시에 강인한 생명력을 발견했다.”)에서 출발한 이 연작은 나뭇가지와 나뭇잎 위에 쌓인 눈을 형상화하고 있다. 작가가 지각하고 그로부터 감각한 ‘생의 불확실성과 강인한 생명력’은 반복되는 화폭의 재현을 거쳐 삶과 죽음의 동시성을 현시한다.
이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적 배경을 배면에 안착시킴으로써 삶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로 이동하는 존재의 소멸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으로 겨울의 풍경이 야기하는 부정성에 잠식되지 않을 식물의 생명력에 대한 긍정을 상기시킨다. ‘살아낸 풍경’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것은 눈, 즉 죽음의 무게를 견디고 ‘살아낸’ 나무의 이후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겨울을 맞이한 생의 불확실성에 매몰되지 않고 그 시간을 살아내고 맞이할 너머의 풍경을 상상함으로써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황폐한 실존을 위무하고 감싸 안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 물론 삶에 대한 긍정이 자칫 섣부른 화해로 이어질 위험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꺾여 좌절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존재가 영위해온 오랜 시간에 바탕을 둔 겸손한 긍정에 기반해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 연장에서 <우리는 여기서 반짝>(2024~) 연작을 마주한다. 이 연작은 두 개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다. 이전 전시에서 받은 꽃들이 자신의 생을 온전히 견디며 말라가는 모습에서 소멸하는 존재가 발산하는 빛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빛을 내는 한 마리 반딧불이로부터 출발한 <슬픔에 밝은 사람들의 지극한 밤>(2024)의 기록이다. 마른 꽃잎과 취약한 빛을 내는 반딧불이의 중첩. 그것은 곧 도래할 소멸로부터 여린 빛을 발산하는 생의 간절로 가시화되며 ‘슬픔의 가장자리’를 톺는다. 그럼으로써 삶과 죽음의 경계를 유영하는 존재와 이를 어루만지는 작가의 손길을 거쳐 무수한 빛으로 확장된다. 이를 ‘자라나는 마음’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마음과 마음으로부터
영문학자이자 미술사가인 W. J. T. 미첼은 이미지와 관련하여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욕망의 문제라고 했다. 이미지의 욕망, 그것은 이미지의 삶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이미지의 삶은 사적인 것 혹은 개인적인 것이 아닌 사회적인 삶을 포괄한다. 이미지는 제2의 자연을 구성하며 세상에 대한 새로운 배치와 지각을 만들어내는, 다시 말해 세상을 만드는 방식이다. W. J. 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이미지의 삶과 사랑』, 김전유경 옮김, 그린비, 2010. 진풀 작가가 재현한 이미지 역시 사적 층위의 개체적 감각에 종속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서사를 전유해 타자와 맺는 사회적 관계의 층위라는 새로운 배치와 지각을 통해 공적 가치, 즉 위안과 위무의 빛을 공유하려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다시 이번 전시의 표제작인 <마음과 마음들>을 보자.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이 작품들에서 공통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상실을 예감하면서도 이를 새로운 삶의 지평으로 삼아 지속하는 관계의 층위로 전유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일 것이다. 이는 진풀 작가가 지향하는 슬픔의 연대를 향한 꿈으로부터 비롯하여 개별적 존재의 삶에 깃든 자기 서사를 거듭 수행해 온 여정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진풀 작가의 작품이 내보이는 바를 빛을 틔우는 마음의 여정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빛을 틔우는 마음의 여정’, 그것은 불완전한 존재를 향한 한없는 긍정과 소멸의 순간 발하는 삶의 총체를 희미하게나마 지속하려는 ‘마음과 마음들’의 절실함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절실함은 전시 《마음과 마음들》을 통해 그늘지고 어두운 구름 뒤에 실처럼 희미한 빛, 실버 라이닝(silver lining)의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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